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st Viscount Montgomery of Alamein 애칭: 몬티, Monty 1887~ 1976)
영국 스카파 플로우 군항의 전함 듀크 오브 요크 선상에서
몽고메리와 처칠
몽고메리와 영국왕 조지 6세
영국의 군인 몽고메리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투신하였다.
1910~1914년에는 인도에 근무하였고 914년에 1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에서 근무하였다.
1931년에 대령 1938년에는 소장으로 진급되어 팔레스타인에서 사단장으로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3사단장을 맡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독일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됭케르그 철수후에는 5사단장을 거쳐 1942년에는 북아프리카 전선 제8군 사령관을 맡아
에르빈 롬멜 휘하 북아프리카 군단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후 전쟁 판도의 승기를 마련했다.
1943년 시칠리아 상륙작전과 1944년 6월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국군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하여 원수로 진급했다.
종전 후 1946년 영국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가터 훈장도 수여받았다.
이후 참모총장을 거쳐 1951년 부터 1957년까지 (NATO) 군 최고사령관 대리로 있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연합군 상륙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 육군원수였다.
그는 오만할 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병적일 정도로 대미(對美) 우월감이 강한 영국 군인이었다.
몽고메리는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첫 연합군 승리를 안겨준 지휘관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나치즘을 무찌르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가져 온
대독일 연합군 작전에서 중요한 지휘 역할을 맡았다.
몽고메리는 군인으로서는 누구보다 탁월한 지휘력을 가지고 용맹을 떨쳤지만 세련된 영국 신사형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거만하고 거칠고 허영심이 많고 때로는 기상천외의 일도 저지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몽고메리는 전투에서 부하 장병들이 끊임없이 전진, 승리를 거머쥐게 한 마력의 소유자다.
그는 1887년 11월17일 영국에서 태어난 지 2년 후 영국 국교의
독실한 주교인 아버지와 함께 타스메니야 지역으로 이주했다.
몽고메리의 청소년 시절은 불행했다.
그의 군대생활 시작도 처음에는 이런 불행으로부터의 탈출구였다.
몽고메리는 성 바오로 고등학교에서 4년을 마치고 1907년 영국 육군사관학교인 샌드허스트에 입학했다.
1908년 여름 그는 다른 사관생도들을 괴롭힌 죄로 퇴학 지경까지 갔다가 간신히 용서를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역시 그의 괄괄한 성격 때문이었다.
몽고메리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도 마시지 않았지만 설치기 좋아하는 난폭성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첫 근무지인 인도에서 그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난투극에 연루돼
봄베이 요트 클럽 하우스를 다 부숴놓기도 했다.
그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는 절대금주자였다.
그럼에도 몽고메리는 만취상태인 다른 장교들과 달리 맹숭맹숭한 정신으로
순전히 폭력을 즐기기 위해 난투극에 참여하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최전선에서의 용맹성과 뛰어난 참모 역할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몽고메리는 피비린내 나는 프랑스 전선의 참호 속에서
그후 다른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슬기로운 지휘 능력을 배양했다.
1914년 8월23일은 자기 부대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날 작전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몽고메리의 소대는 르 카토에서 독일군을 맞아 싸웠다.
앞뒤조차 가릴 수 없는 혼란스러운 전투에서 몽고메리는 많은 소대원들을 잃고
자신도 며칠 동안 행방불명자로 신고되기도 했다. 참으로 기억하기 싫은 쓰라린 패배 경험이었다.
1914년 10월13일 26세의 몽고메리는 와이프레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승리했다.
이때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무공과 용맹성으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고 대위로 진급했다.
영국으로 후송돼 치료를 마친 몽고메리는 제104여단 참모장교로 프랑스 전선에 복귀했다.
그는 여기에서 1915년 6월24일부터 11월13일까지 대학살전이 벌어진 소머 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몽고메리는 남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참모장교로서 보다 더 책임있는 직책을 맡아 처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는 중령으로 진급, 탁월한 전투 지휘관 ·참모장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몽고메리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며
보충 재교육을 받거나 일선 복무를 번갈아가면서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사단을 지휘하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9년 9월30일 다시 프랑스에 상륙했다.
이때 자기 사단의 임무는 초기 전투에서 연합군이 후퇴하기 전 추격하는
독일군에 대항해 벨기에의 루방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몽고메리는 됭케르그 전투에서 독일군이 연합군 교두보를
측방 공격하지 못하게 방어하면서 후퇴작전 중 후방 방어를 지휘했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몽고메리가 위대한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행운은 1942년 8월에 찾아왔다.
벼랑끝까지 몰린 것 같았던 영국군이 한숨 돌린후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전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될 새로운 인물이 사막에 그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장차 2차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가 될 사막의 쥐 버나드 몽고메리가 도착한 것이다.
사실 몽고메리가 북아프리카로 오게된 과정은 몇가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의 계속되는 패배의 소식으로 인해
영국수상 처칠은 롬멜 노이로제에 걸려있었다.
분명히 병력과 물자면에서 우월한 영국군이 롬멜군에게
연전연패를 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토브룩이 함락된 직후에 처칠은 너무나 큰 충격에 빠져 가끔씩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롬멜! 롬멜! 정말로 듣기 싫은 이름이다!
우리 영국군은 진정 그 놈 하나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인가....
정말로 나에게는 롬멜을 꺽어줄 인재가 없는가!
이런 현상은 처칠만이 아니어서 서부사막의 살아있는 전설이된
롬멜에 관한 여러 가지 과장된 소문 덕분에
대부분의 영국 장성들은 그들이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어 롬멜과 싸우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으며
은근히 롬멜을 어떻게든지 피하려고 했다.
결국 오킨레크 장군이 지난기간 동안 거듭된 패배의 책임을 떠맡고 중동 파견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면서
후임으로 헤롤드 알렉산더 대장이 부임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장군이 야전에서 제 8군을 이끌 후임 장군으로
임명한 인물은 몽고메리가 아니라 고트 중장이었다.
그러나 고트는 1942년 8월 7일 브리스톨 수송기를 타고 이집트로 향하던중
JG 27 소속의 Bf 109F 전투기들을 만났으며 그가 탑승하고 있던 수송기가
집중사격을 받은후 추락하여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처칠은 후임으로 몽고메리 중장을 급히 선발하여 사막으로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매우 절묘한 인사가 될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동안 별로 이름을 알릴 기회가 없었던 몽고메리는 독일공군의 활약상 덕분에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게된 것이다.
몽고메리가 대신 사령관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그는 제8군 사령관을 맡았다.
제8군은 독일의 에르빈 롬멜 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군에 전투 때마다 연전연패해
장병들의 사기가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몽고메리는 이런 심각한 문제의 해결사로서 제8군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그는 즉각 제8군의 신뢰와 자신감을 쌓는 작업에 착수, 장병과 탱크및 야포를 대폭 증강했다.
1942년 8월31일부터 9월2일까지 아람 할파 지역 전투에서 몽고메리 부대는 로멜 부대의 전진을 저지했다.
이 전투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 몽고메리는 병력 ·무기를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증강시키고 주도면밀한 반격을 개시했다.
그는 독일군의 수적 열세와 병참 지원의 약점을 이용,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1942년 10월23일 엘 아라메인 전투에서 롬멜군을 패주케 하고
5만9000명의 독일군을 사살 또는 포로로 잡고 500대의 독일 전차를 파괴했다.
그는 이 전투 승리 후 몸을 사리면서 소극적 공세를 취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때 공격을 둔화시켰다는 주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1943년 5월12일 서쪽에서 진격해 온 미군과 합류하여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추축국 군대의 모든 저항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 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 전투 승리 때는 몽고메리 생애에서 최전성기였다.
그 이상의 성공도 가능했지만 그는 장차 부대 지휘권이 미국에 넘어간다는 데 대해 못내 서운해 했다.
몽고메리는 평소 미국인들이 영국인들보다 열등한데
어떻게 자기가 미국 지휘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이런 불만과 미국인들에 대한 경시 태도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미국의 작전 지휘권에 대한 이런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는 43년 7월19일 시칠리아 섬 상륙작전 때 자기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해 대승을 거두었다.
시칠리아 섬 상륙 후 자기가 맡은 지역을 확보한 다음
그는 다음 단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 ·준비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100만 명으로 구성된 45개 사단의 지상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 상륙 교두보 확보작전과 요충지 카옌 시 점령 때 신속히 행동하지 않고 꾸물거렸다.
거기에다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과 불화를 빚게 되자
미군 사령관들이 지상군 지휘권을 넘겨 받아 직접 행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동렬로 격하, 아이젠하워 휘하에서 작전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후 몽고메리는 여전히 거칠고 신경질적이었지만 연합군의 파리 해방 때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공적 책임과 개인적 감정을 철저히 구분할 줄 아는 슬기로운 장군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는 마지막 독일 진격 때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아이젠하워는 전선을 폭넓게 확대해 공격하기를 원했지만
몽고메리는 거대한 단일 전선으로 돌파해 들어갈 것을 주장했다.
지상군 원수인 몽고메리는 먼저 라인 강 교량을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공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뒤따라 온 기갑부대들이 독일 중심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측은 그의 그런 작전 동기를 의심했다.
그가 지상군을 이끌고 먼저 독일 점령을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추가로 2개 미군 사단을 자기 지휘 아래 두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44년 9월17일 독일로 쳐들어 가기 위해 네덜란드로 수천 명을 공수하는 마케트 가든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작전이 계획대로 성공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44년 크리스마스 전에 끝났을 것이다.
독일군이 연합군 진격로의 목을 지킨다는 정보를 사전 탐지하지 못해
몽고메리군 장병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1944년 12월 프랑스 아르덴느지역 공격시 북부지역을 잘 방어함으로써
네덜란드 작전 실패를 어느 정도 보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발지 전투시 미군의 전투 능력이 보잘것 없다고
쓸데없이 깎아내려 공연히 미군 지휘관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최종단계에서 몽고메리는 영국군을 지휘하여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을 성공시켜 잇따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일련의 성공적 전투에서 네덜란드 ·덴마크 ·북부 독일을 점령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45년 5월14일 발틱 해안의 뤼벤부르크 헤스 지역에서 독일군의 전면적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모든 작전계획이 완벽하지 않을 때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부했는데
이런 작전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장단점을 갖고 있었다.
부하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모든 계급의 부하들로부터 칭송과 인기를 모았지만
부하들에 대한 과잉 요구와 빈번한 파면 조치 등은 그가 동료 장군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과 여타 연합국가들은 그의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지만
윈스턴 처칠만은 그를 정당하게 평가했다.
처칠은 “몽고메리의 엘 알라메메인 작전 승리 이전 연합군은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고
그 작전 후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그의 용맹성을 격찬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는 미국 전쟁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몽고메리는 전후 영국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독일에 머물렀고
1951년부터 58년 은퇴할 때까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군을 지휘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1976년 3월25일 영국 알튼 지방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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